전투기에게 있어 우수한 기동성(maneuverability)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멀리서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로 적기를 격추시키는 시계 외 공중전(BVR)이 보편화되면서 첨단 전투기에 근접 공중전(Dogfight) 능력과 우수한 기동성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한참 동안 구글링을 했는데요. 운 좋게 미국의 집단지성 사이트 쿼라(Quora)에서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미 해군 조종사로 근무했던 애덤 데이뮤드(Adam Daymude)가 써놓은 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전투기의 기동성과 관련하여 써놓은 글을 잠깐 소개해 보겠습니다.
『전투기를 멀리서 손쉽게 격추시킬 수 있는 BVR 미사일이 있는데 기동성이 뛰어난 전투기를 왜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생각해 보라. 당신을 향해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이 발사되었을 때 “오~ 그 미사일을 발사했군. 알았어. 난 그냥 포기하고 격추당할래!” 라고 말해야 옳겠는가? 당연히 안될 말이다.
당신은 그 미사일을 물리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 분명하다. 확실하게 검증된 방법은 미사일로 하여금 최대한 자주 방향을 바꾸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방향을 어디로 바꾸든지 미사일은 따라오기 때문에 기수를 돌리고, 돌리고 또 돌려라! 따라오는 미사일의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을 노리는 것이다.
만약 그래도 미사일이 따라온다면 그날은 나의 날이 아닌 것이다.
우수한 기동성의 필요성은 공대공 임무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대 전투기들은 대부분 공대공, 공대지 그리고 공대함 임무를 모두 수행할 수 있는 다목적 전투기이다. 다목적 전투기들은 때때로 컴퓨터가 계산해낸 포인트를 향해 폭격을 실시해야 하는데 이때 매우 역동적인 환경에 처할 수 있으며 근접공중지원(CAS) 임무를 수행할 때도 목표물을 공격한 뒤 빠르게 그 장소를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우수한 기동성을 갖춘 전투기는 생존율과 임무 성공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직 미 해군 파일럿 애덤 데이뮤드의 글을 통해 현대 전투기에 있어 우수한 기동성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KF-21 보라매와 관련된 외신을 번역하다가 KF-21의 무장 탑재력이 F-16C/D와 동일한 7.7톤이라는 사실에 의문이 생겼던 적이 있습니다. F-16C/D보다 한 체급 더 크고 두 배 더 넓은 전투행동반경과 항속거리를 지니고 있는 KF-21 보라매가 무장 탑재력에서 F-16C/D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죠. 기술력의 차이인가? 아니면 모종의 목적이 있는 것일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저는 결국 KF-21 보라매에 정통한 전문가에게 직접 질문해 보았습니다. 정말 바쁜 분이라서 답을 못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오히려 다행스럽게도 “좋은 질문을 해주셨다”며 흔쾌히 답을 주셨습니다.
전투기를 개발할 때 가장 먼저 이루어지는 작업은 “소요군인 공군이 필요로 하는 성능”을 바탕으로 한 개념설계 단계입니다. 공군의 요구가 반영된 개념설계에 따라 구체적인 설계가 진행되는데요. 역으로 우리는 개발되어 나온 기체의 구체적 성능을 분석하여 해당 전투기의 개념설계를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중형급 전투기 KF-21 보라매는 무슨 이유로 경량 전투기 F-16C/D와 동일한 7.7톤의 무장 탑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전문가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이야기는 해당 전문가의 개인적 의견이라는 점, 미리 강조 드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
F-16C/D의 경우 공허중량이 8.5톤, 날개면적은 27.87㎡, 내부 연료탑재량 3.2톤, 최대이륙중량은 19.1톤입니다. 이에 대비되는 KF-21 보라매는 공허중량 12톤, 날개면적은 46.5㎡, 내부 연료탑재량은 X톤(6톤 추정) 그리고 최대이륙중량이 25.7톤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소개될 전문가 설명에서도 언급되지만 양력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날개면적과 공허중량입니다. 그리고 KF-21 보라매의 공허중량은 F-16C/D보다 70% 정도 더 무겁지만 날개면적 역시 60% 정도 더 크죠. 이는 일단 KF-21 보라매와 F-16C/D가 거의 대등한 수준의 양력을 발생시키고 그 결과 비슷한 수준의 기동성을 보여줄 것이라는 추론의 근거가 됩니다. 역주)
데이터를 얼핏 살펴 봐도 F-16C/D보다 덩치가 훨씬 큰 KF-21 보라매가 더 많은 무장을 탑재해야 할 것 같은데 어째서 두 기체의 무장탑재력이 7.7톤으로 동일한 것이냐? 라는 질문은 매우 좋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투기가 공중을 날 수 있는 힘, 즉 양력을 결정하는데 있어 제일 중요한 요소는 날개 면적(wing area)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가 바로 기체 자체의 무게인 공허중량입니다. 이 두 가지를 받쳐주는 요소가 엔진의 추력이고요.
(F-16C/D에 사용된 GE F110-129의 드라이 추력은 약 17,000 파운드이고 KF-21 보라매에 탑재된 GE F414의 드라이 추력은 대략 15,000 파운드 정도로 F-16C/D에 탑재된 엔진이 더 높은 추력을 내지만 무장탑재력에 있어 유의미한 차이나 변화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전문가는 말했습니다. 역주)
또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F-35 라이트닝 II의 경우 날개면적은 42.7㎡로 KF-21의 날개면적 46.5㎡보다 10% 정도 작습니다. F-35 라이트닝 II의 공허중량은 13톤이기 때문에 KF-21의 공허중량인 12톤보다 1톤 더 무겁습니다. KF-21 보라매의 날개면적이 10% 더 크지만 공허중량은 1톤 더 작다는 의미는 기본적으로 KF-21 보라매의 양력이 F-35보다 더 크고 그 결과 훨씬 더 기민한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KF-21보다 기동성이 떨어지는 F-35가 8.16톤의 무장 탑재력을 지니고 있는데 반해 양력과 기동성에 여유가 있는 KF-21은 오히려 7.7톤의 무장 탑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힌트는 바로 전투기가 지니고 있는 운용설계요구나 설계개념이 각자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KF-21 보라매 설계자가 생각하고 있는 운용개념은 KF-21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기동성을 해치지 않겠다는데 있습니다.
사실 전투기의 무장 탑재력은 절대적으로 정해진 상수가 아니라 날개면적(wing area)에서 발생하는 양력과 비행시 발생하는 중력가속도(G)가 허용하는 구조강도 범위에서 얼마든지 조정될 수 있는 일종의 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KF-21 보라매의 무장 탑재력이 7.7톤으로 발표되었다는 소리는, KF-21 개발 과정에서 검토된 무장 탑재량이 7.7톤이었다는 뜻일 뿐이며 그 이상 무장을 탑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굳이 뒤뚱(?)거리며 기동성을 손상시키는 상태로 비행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검토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KF-21 보라매의 구조는 +9G -3G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무장 탑재력을 조정할 수 있는 여력이 많은 편입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KF-21 보라매의 최대이륙중량이 25.7톤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무게가 25.7톤을 넘어가더라도 비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다만, 기동성 등을 고려한 운용 설계 개념상 권장되는 최대이륙중량이 25.7톤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F-16C/D와 KF-21 보라매 무장 탑재력에 대한 재미있는 사례 한가지를 가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설명 드린 바와 같이 F-16C/D와 KF-21 보라매의 무장 탑재력은 7.7톤으로 동일합니다. 여기서 F-16C/D와 KF-21 보라매에 똑같이 950㎏ 무게의 JDAM 4발을 무장시켜 공대지 공격 임무에 투입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겠습니다.
경량 전투기 F-16C/D가 중형 전투기 KF-21 보라매와 동일한 수량의 무장을 탑재한 채 임무에 나설 수 있으니 F-16C/D가 훨씬 더 비용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경량 전투기 F-16C/D의 최대이륙중량은 19.1톤이고 중형급 전투기 KF-21 보라매의 최대이륙중량은 25.7톤이라는 차이점이 있죠.
무장이 탑재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서로 대등한 기동성을 선보일 수 있는 F-16C/D와 KF-21이지만 한발당 거의 1톤 가량의 무게를 지닌 JDAM 4발을 장착하는 순간부터 기동성에 큰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최대이륙중량이 19.1톤에 불과한 F-16C/D는 탑재하고 있는 무장의 무게가 최대치 7.7톤에 가까워질수록 속도가 느려지고 조종간에 대한 반응도 늦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만에 하나 F-16C/D가 공대지 공격 임무를 성공하기 전에 적기를 만나게 되면 기동성을 최대로 살린 공대공 전투를 위해 나머지 공대지 무장을 버려야만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설명한다면 F-16C/D의 경우, 공대지 무장을 잔뜩 싣고 가다가 적기와 조우하는 경우 공대지 공격 임무는 실패할 확률이 대단히 높아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최대이륙중량이 25.7톤에 달하는 KF-21 보라매는 공대지 공격작전 수행을 위해 950kg JDAM을 4발 탑재하더라도 비행 속도나 기동성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KF-21의 경우 무장 탑재량 7.7톤은 기동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설정된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KF-21은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는 미티어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 4발과 IRIS-T 열추적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공대공 전투에 대단히 유리할 뿐만 아니라 기동성 문제 때문에 일부러 공대지 무장을 버려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즉, KF-21 보라매의 경우 편대장은 공대공 전투 기동 전환에 큰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커다란 운용상 특징이 될 것입니다.
중형급 전투기 KF-21 보라매의 무장 탑재력이 경량급 전투기 F-16C/D와 동일한 7.7톤으로 설정된 것은 우수한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제공권 확보로 공중전에서의 생존율을 높이고 공대지 임무 성공률도 높이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
지금까지 KF-21 보라매에 정통한 전문가가 보내준 KF-21 보라매가 F-16C/D와 동일한 수준의 무장 탑재력을 지니고 있는 이유에 대한 답변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KF-21 보라매가 F-16C/D와 동일한 7.7톤의 무장 탑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기술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우리 공군이 KF-21 보라매에게 가장 중요한 성능으로 요구했던 “기동성”과 “임무 성공률”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근접 공중전을 설계개념으로 삼고 있던 F-16의 초기형 F-16A/B의 경우 공허중량이 7.8톤에 불과했고 매우 뛰어난 지속 선회율과 에너지 보존 능력 및 가속성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F-16의 설계개념은 다목적 전투기로 바뀌기 시작했고 F-16C/D에 이르러서는 더 많은 공대지 무장을 탑재하기 위해 최대이륙중량을 2톤 이상 늘리게 됩니다. 그러나 양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날개면적을 늘리는 설계변경을 시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기동성을 희생하게 되었습니다. 기동성을 잃은 전투기가 얼마나 불리한 입장에 서는지는 애덤 데이뮤드의 글과 KF-21 전문가가 예시로 들었던 상황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GE F414 엔진을 함께 쓰고 체급이 거의 비슷하다는 이유로 KF-21 보라매와 비교할 수 있는 기체는 F/A-18E/F 슈퍼호넷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외신을 읽고 전문가들로부터 설명을 듣다 보니 왜 KF-21 보라매를 “스텔시한 슈퍼 F-16”이라고 부르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외신들은 FA-50을 F-16의 수많은 파생형들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틀린 이야기도 아니고요. FA-50을 개발했던 당시 F-16의 유전자와 기술들이 대거 투입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KF-21 보라매는 FA-50을 개발하면서 습득한 기술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전투기이고요. KF-16을 오랜 시간 주력 전투기로 사용해왔던 우리 공군이기 때문에 보라매에 요구했던 성능도 KF-16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미 공군의 에이스이자 전략가 그리고 전투기 마피아(Fighter Mafia)로 이름을 날렸던 존 보이드에 의해 주창된 근접 공중전용 경전투기 F-16은 긴 세월을 거치며 본래의 설계개념과는 상당히 다른 다목적 전투기로 변신해왔습니다.
현재 블록 70/72까지 개량되어온 F-16은 더 이상 존 보이드가 주창했던 저렴하고 날렵한 경전투기로 보기 어려울 정도죠. 이제 F-16 본래 설계개념의 뒤를 잇는 “저렴하고 날렵한 경전투기”의 계보는 오히려 한국항공우주산업이 만든 FA-50이 가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틀이 바뀌지 않는 이상 내용물이 바뀌는데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스텔스(Stealth)라는 요소까지 가미해 기존의 틀을 완전히 바꾼 새로운 F-16. 그것이 어쩌면 KF-21 보라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포스팅을 유튜브 영상으로 보고 싶다면? https://youtu.be/LPhvyjUwE6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