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예고했던 대로 오늘 포스팅은 미국의 국제정세 전문지 Foreign Policy가 지난 8월 14일 게재한 기사 『The Fighter Jet Market Enters Its Multipolar Era. Can the F-35 and the United States keep up with new competition?』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을 전달하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많은 해외 밀리터리 기사를 접하면 접할수록 정치, 경제 및 지정학적 이슈들이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분야가 군사 분야임을 실감할 수 있으며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늘 통감하고 있습니다. 혹시 논지를 전개함에 있어 부족한 부분이 보이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국 출신의 아마추어 사학자이자 프리랜서 작가인 제임스 어윈(James Erwin)은 2011년 흥미로운 인터넷 단편 소설을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Rome Sweet Rome’ 이라는 제목의 이 인터넷 단편소설은 미 해병원정대(Marine expeditionary unit: MEU)가 모래 폭풍을 만나 2천년 전으로 타임 슬립을 하게 되고 로마 제정시대 최강이라고 일컬어지던 로마 군단과 맞부딪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예상보다 큰 인기를 누리며 영화로 제작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었지만 저작권 문제 때문에 아직 개봉되지는 못했습니다.
미 해병원정대(MEU)는 아메리카급 강습상륙함 1척에 약 1,100여명에 이르는 전투요원과 각종 기갑차량이 탑승하고 있으며 지금은 F-35B로 교체되고 있는 AV-8B 해리어 수직이착륙 공격기 6대, AH-1Z 바이퍼 공격헬기 4대, UH-1Y, MV-22B 등으로 구성된 항공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력을 갖춘 미 해병원정대와 2천년 전 로마 군단이 싸운다면 결과는 뻔할 것 같지만 제임스 어윈은 미 해병원정대가 로마 군단에 패배하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 짓습니다.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유류와 탄약을 제때 보급받지 못한 미 해병원정대가 월등하게 앞선 화력에도 불구하고 인해전술로 밀려들어오는 로마 군단병들 앞에 하나 둘씩 침묵하며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어윈은 전쟁에서 첨단 무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원활한 보급과 물량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데요. 실제로 미국은 엄청난 보급 능력과 물량을 앞세워 첨단 무기로 무장한 독일 나치를 물리치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590화 『다극화된 전투기시장에서 F-35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KF-21에게 기술이전 및 암람통합을 거부했던 미국, 후회하기 시작하다』편을 통해 “F-16은 해낼 수 있었지만 F-35는 해낼 수 없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다목적 경량 전투기 F-16은 하이급 공중우세기 F-15를 보조하는 로우급 전투기로 개발되었지만 F-15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저렴한 도입비와 운용 유지비, 높은 신뢰성, 넓은 범용성 때문에 많은 공군들로부터 사랑 받으며 2017년까지 무려 4,600대라는 엄청난 숫자로 생산되었습니다. 로우급 전투기였던만큼 미국도 우방국이라면 크게 까탈부리지 않고 수출했고 워낙 많은 수로 생산되었던 만큼 ‘보급과 물량’이라는 측면에서도 유리한 점이 많은 전투기였다고 말씀 드렸죠.
말처럼 우직하게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전장의 Workhorse(노역마)’라는 별명까지 얻은 F-16에 비해 최첨단 항공우주기술이 집약된 F-35는 잦은 고장과 결함에 시달리고 있어 가동률이 떨어지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정밀 전쟁기계라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비용과 기술 그리고 보안 문제 때문에 수출에도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어 F-16같은 ‘규모의 경제’ 실현도 어렵습니다.
어떤 시청자는 F-35도 3,400대 넘게 생산될 예정이라며 F-16 못지 않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지적하셨는데요.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주의해서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공군이 쓰는 A형과 해병대용 B형 그리고 해군용 C형을 모두 포함해야 3,400대라는 생산량이 달성되기 때문입니다.
규모의 경제를 이야기하려면 상호 물류지원이나 부품 호환이 가능해야 하는데 사실상 F-35 A, B, C 이 세가지 파생형들은 서로 다른 전투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호환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가장 많이 생산된 F-35A의 유닛 코스트는 2019년 한때 가격이 7,800만 달러, 현재 환율로 1,047억까지 떨어졌었지만 가장 낮은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는 F-35B의 유닛 코스트는 지금도 1억 7,700만 달러, 현재 환율로 2,370억이 넘는 금액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F-35A를 기준으로 했을 때 총 2,600여대 정도가 생산될 예정인데 그 중에서 미 공군에 인도될 숫자가 1,760여대로 전체의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해외로 수출되는 F-35A의 숫자는 전체의 3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더구나 미 공군은 업그레이드에 들어가는 추가 비용, 과다한 운용 유지비 때문에 어떻게든 F-35A 도입 숫자를 당초 숫자보다 삭감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F-16의 경우는 정반대입니다. 현 시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미 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F-16의 수량은 전체의 30%에 불과하고 나머지 70%는 해외 공군들이 운용하고 있습니다. F-16이 이렇게 엄청난 숫자로 해외에 공급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국은 세계 전투기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70년대에 개발된 F-16은 블록 70/72 버전까지 꾸준히 업그레이드되며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입니다. 미국의 군사전문지 Air and Space Forces가 2022년 4월 4일에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미 공군은 2040년까지 F-16을 계속 운용할 계획이지만 향후 6~8년 안에 F-16의 후속 기종을 선택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미국이 세계 전투기 시장에서 예전의 지배력을 회복하고 싶다면 과거 F-16처럼 전체 생산량의 70% 정도를 해외에 공급할 수 있는 저렴하고 가성비 좋은 전투기를 개발하여 보급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5세대 스텔스 전투기 F-35나 6세대 전투기 NGAD 같은 고성능/고비용 전투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F-16을 무인기로 대체하자는 의견도 보이고 MR-X라고 불리는 4.5세대 전투기를 처음부터 새로 개발하자는 의견도 보이지만 어느 쪽도 선뜻 내키지 않는지 미 공군은 “당분간 현상 유지”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KKMD 590화를 통해 번역했던 Foreign Policy의 기사 “다극화 시대로 접어든 전투기 시장. 미국과 F-35는 새로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를 통해 다극화된 세계 전투기시장을 대하는 미국의 고민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F-16을 통해 전투기 시장에서 누려왔던 독점적 지위를 포기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으며 F-16과는 전혀 다른 설계 개념을 지닌 F-35로는 예전의 영광을 다시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미국도 깨닫고 있죠.
앞으로 미국의 전투기 정책에 대해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F-16으로 대표되던 중저가 다목적 전투기 시장에 MR-X 같은 클린 시트 전투기로 다시 도전장을 내밀 것인지 아니면 Foreign Policy의 지적대로 중저가 다목적 전투기 시장에 직접 진출하는 것은 포기하고 대신 각국이 진행하고 있는 국가 전투기 개발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엔진과 각종 항전장비 판매에 집중할 것인지의 여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 없었던 전투기를 아예 처음부터 새로이 설계하여 개발하는 방식을 클린 시트(Clean-Sheet)라고 부르는데 만약 미국이 KF-21 보라매 같은 4.5세대 전투기 MR-X를 클린시트 방식으로 개발하는 쪽이 보다 현실적이었다면 Foreign Policy의 기사 내용도 다소 달라졌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미첼 항공우주연구소 헤더 페니(Heather Penney) 연구원의 이야기처럼 "미국은 F-35 개발에 이미 너무 많은 돈을 투자했고, 이제 좋든 싫든 F-35는 미국이 가진 최선의 선택”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돈이 더 투자되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미국은 F-35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죠.
거기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NGAD, FA-XX, B-21 Raider 처럼 엄청난 비용이 투자되는 대형 고성능 전투기 프로젝트도 멈출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4.5세대 전투기 MR-X까지 클린시트 방식으로 개발하게 된다면 짊어지고 가야 할 부담이 너무 커지게 됩니다. 록히드 마틴은 F-35 생산에 바빠 F-16을 최신 사양으로 개량하는 작업에도 여력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고 보잉은 훈련기에 불과한 T-7A를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난맥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누구에게 MR-X 개발을 맡길 수 있을까요? Foreign Policy가 F-16을 대체할 새로운 4.5세대 전투기를 개발해서 판매하는 방안 대신 항공용 엔진과 각종 항전장비 판매에 미국 전투기 업계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주장한 데는 이러한 이유가 숨어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K-방산이 앞으로도 계속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미국이 ‘정말로 지키고 싶어하는 핵심 분야’에서 정면충돌하는 상황은 피해가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만약 미국이 4.5세대 전투기 시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KF-21 보라매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했을 것입니다. KF-21 보라매가 처음부터 F-35와 경쟁관계에 있지 않은, 오히려 보완 관계에 있는 4.5세대 전투기임을 표방했기 때문에 그나마 미국의 견제가 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상보다 우수한 KF-21 보라매의 성능을 확인하고 록히드 마틴과 미국 방산업계가 깜짝 놀라고 있다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군사 전문지들은 KF-21 보라매를 두고 종종 스텔시(Stealthy)한 F-16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항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스텔스 설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F-16을 닮은 기동성과 비행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이 F-16과 기본 설계를 같이하고 있는 T-50을 통해 전투기 개발 역량을 습득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KF-21 보라매 역시 설계 사상이나 기능 면에서 F-16과 많이 닮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어떤 분들은 체급 면에서 보잉이 만든 F/A-18 E/F 슈퍼호넷과 비교해야지 어떻게 경량 전투기인 F-16과 비교할 수 있냐고 기분 나빠하기도 하지만 저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수한 가성비와 신뢰성 그리고 넓은 범용성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F-16의 자리를 KF-21 보라매가 이어받을 수 있다면 향후 50년 이상 세계 무대에서 맹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군사 전문지 Foreign Policy도 지적했듯이 방산제품 수출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눈에 보이는 경제적 수익에 그치지 않습니다. 같은 차량용 부품이라도 군용 제품에 사용되는 것들은 민간 부품보다 10배 이상 강한 내구성을 요구 받기 마련입니다. 어떤 군사 전문가는 군용 부품은 ‘극한’의 성능과 내구성을 추구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해당 군사 전문가는 세계 무대에서 통용되는 무기체계를 만들 수 있는 첨단기술과 산업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잠재적 적성국가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만드는’ 힘이 된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설명이었습니다.
영상을 마무리하기 전에 2023 MADEX에서 만났던 업계 관계자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싶은데요. 조종사 출신인 이 관계자는 F-35가 지니고 있는 첨단 기능 중에 착륙시 조종석 대형화면 표시 영상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터치하면 컴퓨터가 알아서 착륙과정의 상당 부분을 자동으로 수행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이야기해 준 적이 있습니다.
파일럿들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이륙과 착륙 과정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정말로 편리한 첨단기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것은 KF-21 보라매에도 똑같은 기능이 구현되어 있다는 전언이었습니다. 현재 미 해군은 이런 자동 착륙기능을 강화시켜 항모 함재기에 적용하고 있는데요. ‘통제된 추락’이라 불리며 함재기 파일럿 양성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항모 착륙과정이 완전 자동화되는 시점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 군사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훗날 만약 KF-21N가 등장한다면 미 해군의 함재기들처럼 자동화된 이착륙 시스템을 사용할 개연성이 높아진다는 뜻이죠.
개인적으로 KF-21 보라매에 이런 첨단 기능이 탑재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어쩌면 KF-21 보라매는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 그 이상으로 진보되어 있는 최첨단 전투기가 아닐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포스팅을 유튜브 영상으로 보고 싶다면? https://youtu.be/aDtFSbpx4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