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보았던 도로를 오가던 소나 말이 끌던 달구지 이야기나 흑백 TV 이야기를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이야기 해주면 그렇게 신기한 눈으로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바퀴가 셋 달린 삼륜차가 도로를 달리고 머리 위로 무거운 보따리나 짐을 몇 단계나 쌓아 올린 채로 길거리를 유유히 걸어가는 할머니의 모습들도 그들에겐 마치 오래된 옛날 흑백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선생님 엄청 옛날사람 같아요~” 킬킬대며 웃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저의 어린 시절인 70년대를 다시 되돌아 봅니다.
https://youtu.be/_QLBVsdM9k0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할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와 6 25 전쟁이 끝난 후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만들어 낸 국산 화포인 KH-178 105mm 견인 곡사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현재 저렴하면서도 뛰어난 성능으로 세계적인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주포 K-9에 관한 자료들을 조사하다 보니 KH-178 105mm 견인포에 관한 정보까지 연결되게 되었는데요.
먼저 영국 소재 유명 군사전문지 Jane’s에 게재된 대한민국 최초의 곡사포 KH-178과 그 업그레이드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고 KH-178 105mm 견인포의 개발에 얽힌 비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의 원래 출처는 현재 사이트가 폐쇄되어 있는 상태이고 ‘유용원의 군사세계’에 그 내용을 퍼온 글이 남아 있습니다.
기술적인 배경과 도면 하나 없이 맨주먹으로 도전한 KH-178 곡사포 개발에 관한 이야기는 저 혼자 읽고 넘어가기엔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개발비화가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도 있어서 국방TV 자료를 찾아 대조를 해봤습니다.
국방TV의 ‘첨단국가의 초석, 방위산업’ 프로그램도 이 주제를 다루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시청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하네요. 전반적인 이야기의 맥락은 국방TV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다만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 개발비화와 국방TV의 관점에 차이가 있다는 점도 미리 알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KH-178 105mm 견인포 개발비화는 1970년대 이야기이고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사업이기 때문에 이야기에 나오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관점은 KKMD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먼저 영국의 유명 군사전문지 Jane’s에 나오는 기사부터 번역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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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계열사인 대한민국의 WIA는 105mm 38 구경장 KH-178 견인포 시스템을 추가적으로 해외에 수출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 견인포는 오래 전에 대한민국 육군의 작전적 요구 사항에 맞춰 개발되었으나, 지금은 여러 나라에 수출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KH-178 견인포를 운용하는 3개 포병 대대를 배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들 포병 대대는 각각 6문의 KH-178 견인포로 구성된 3개의 포대로 구성되어 있다. 즉, 총 54문의 KH-178 견인포를 운용하고 있는 셈이다.
KH-178 105mm 견인포는 원래 2차 세계대전 직전 미 육군과 해병대를 위해 대량으로 생산된 M101 105mm 곡사포를 그대로 카피한 것이다. 비록 M101 곡사포는 오래된 구식 디자인이고 사정거리가 11.72km에 불과하여 오늘날 요구되는 화포 기준을 크게 밑돌기는 하지만 여전히 전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업그레이드된 KH-178은 원래의 105mm 포신을 이중 포구 제퇴기가 장착된 새롭고 더 길어진 105mm 38 구경장 포신으로 대체되었다. 기존 M101 견인포의 고폭탄(HE)을 발사하면 최대 사거리가 14.7km에 달할 수 있는데, 이 사거리는 로켓 보조탄(RAP)나 항력 감소탄(BB)을 사용하면 18km까지 늘어날 수 있다. 업그레이드된 KH-178도 역시 매우 유용한 사정거리 1.5km의 직사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는 비상시에만 사용될 것이다.
현대 위아(WIA)는 개량된 105mm 견인 곡사포 KH-178의 마케팅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육군에 대량으로 공급된 M114 155mm 견인 곡사포의 업그레이드 키트까지 제공하고 있다.
개량되지 않은 본래의 M114 155mm 곡사포에서 7호 장약과 함께 표준 M107 고폭탄을 발사하는 경우 최대 사거리는 14.6km 정도이다. KH-179라고 불리는 한국형 개량 M114의 업그레이드 내용에는 포신을 새로운 155mm 39 구경장 포신으로 교체하는 것 등이 포함되어있다. 155mm M107 포탄을 발사하는 경우 최대 사거리가 22km에 달할 수 있는데, 로켓 보조탄을 사용하면 이 사거리는 30km까지 늘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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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군사전문지 Jane’s 에 나오는 KH-178 105mm 견인포에 관한 기사를 번역해 보았습니다. 그럼 이어서 ‘유용원의 군사세계’에 소개된 KH-178 105mm 견인포 개발 비화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분량을 약간 줄었으며 이 개발 비화 저자의 서술 관점과 KKMD의 제작 방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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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72년 4월 3일에 거행된 국산병기의 시사회 때 출품된 병기만 대량 생산하면 250만 예비군을 전력화 할 수 있으니 그 군사적 의의는 실로 막대한 것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병기개발에 대해 큰 자신을 얻었다고 보여진다. 다음날 아침 필자를 불러 「105mm 곡사포를 시급히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는, 첫 번째가 앞으로의 병기개발에 관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다. 북한은 대대적인 화력증강을 하고 있는데, 우리 쪽은 대구경(大口徑)화포에서 크게 열세에 놓여 있다. 시급히 105㎜ 곡사포를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이 지시는 국군의 전력강화 면에서 실로 중대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현역 군에서 사용할 대구경 화포를 개발하라는 지시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라는 게 미군이 쓰다가 한국군에 대여해 준 미국 정부 재산으로서 오랜 기간 사용하다 보니 수명이 다 된 것이 많았다. 미국에서는 이미 생산이 중단된 구형(舊型)이었기 때문에 부속품 구하기가 힘들었다. 가장 중요한 부품인 주퇴복좌기(駐退復座器) 같은 것은 고장이 나도 수리할 수조차 없었다. 명중률도 떨어졌는데 그나마 이러한 화포도 북한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박 대통령은 포병출신이다. 이러한 내용은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화포의 수를 대폭 증강하고 고물이 다 된 미국 대여병기를 하루속히 신품으로 교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필요 시에는 예비군도 105㎜ 곡사포까지를 장비시켜 현역군 수준의 전투 사단화할 것을 구상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현역군용 대구경화포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우선 90㎜ 무반동 총이 개발되었고 곧이어 106㎜ 무반동 총의 개발에도 성공했다. 106㎜ 무반동 총은 지프차에 장착하는 대전차포로서 포의 길이가 3.4m나 되는데 큰 대포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제작상에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음 단계가 105㎜ 곡사포였는데, 우선 추진장약이 약실 안에서 폭발하기 때문에 이에 견뎌내는 강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원거리를 정확히 날아가야 하기 때문에 포신 내부는 정밀가공을 해야 하고 강선(腔線)이 있어야 한다. 1만 분의 25㎜ 초정밀가공을 요하는 주퇴복좌기도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화포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미 대량생산해서 실전에 배치하고 있으니 우리도 개발하라는 것이 박 대통령의 긴급명령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화포 개발에 대해서는 미국의 반대가 강경했다.
다음은 국방과학연구소 구상회(具尙會) 박사의 회고담이다.
『저는 당시 미국 정부에서 국방과학연구소에 파견한 기술고문단장인 하딘(Hardin)씨를 만나서 "105mm 곡사포 시제 명령이 떨어졌다. 105mm 곡사포에 대한 기술자료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딘씨는 껄껄 웃으며 "105mm 곡사포는 카빈총과 다르다. 한국은 기술부족으로 불가능하다. 105mm 곡사포의 기술재료는 너무 양이 많아서 방(房) 하나쯤은 될 것이다. 재료검토에만 1년은 족히 걸린다.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소화할 능력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졸라대니 하딘씨는 서울주재 미국 대사관에 문의를 했는데, 그때의 답은 "No! Gun Never!"라는 단지 세 마디 단어였습니다. 게다가 미 대사관은 하딘씨에게 "105mm 포 개발을 못하도록 막으라"는 지시까지 내렸습니다.』
미국 정부는 냉담하다 못해 노골적으로 견제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美 국무부와 주한 美 대사관은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필요한 병기는 미국에서 구입해서 쓰고, 한국은 독자적으로 병기개발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존슨 美 대통령 방한 때 국군 파월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KIST라는 종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는데, 병기개발이 필요하다면 KIST를 이용하면 될 것이지 왜 별도로 병기연구소를 만들려고 하느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셈은 남북한의 대치관계가 군비확충경쟁으로 전환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닉슨 행정부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러니 중국을 조금이라도 자극하는 일은 삼가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심까지도 써야 했다. 주한미군 1개 사단을 철수하고 나머지 주한미군도 조만간 철수한다는 「애드벌룬」을 띄운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편 중국은 38선을 자기 나라의 이익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자연 북한은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어야만 했다. 중국이 북한과 「즉시개입조약」을 맺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중국과 친선을 꾀하려면 북한도 자극하지 말아야 했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남한의 군사력을 현 상태로 유지하는 길밖에 없는데 남한에서 대구경화포를 개발한다니 닉슨 행정부로서는 자못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렇게 돼서 우리나라의 대구경화포(105mm 곡사포) 개발은 기술자료도 없이 간단한 청사진 도면 몇 장만 갖고 시작하게 됐다.
당시 화포의 시제개발을 총괄했던 국방과학연구소의 개발요원 김대선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오 수석의 지시는 105mm 곡사포를 시제하라는 것이었어요. 나는 이 말을 듣자 아찔했습니다. 105mm 곡사포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 사정으로는 당치도 않은 과욕이었습니다. 우선 도면도 한 장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면도 없이 어떻게 만드느냐?"고 따지니, 실물 105mm 포를 갖다가 치수를 재가며 도면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105mm 포의 정밀도는 100분의 1mm를 따져야 합니다. 이 정도의 정밀도는 책상 위에서 측정하는 데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 대포 구석구석을 측정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확한 도면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국군이 소유하고 있는 105mm 포는 6.25 전쟁 당시부터 쓰고 있는 고물이라서, 마모가 심해 정확히 측정한들 소용이 없는 수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포의 내부를 가공하려면 전문기계가 필요합니다. 길이가 긴 포신을 깎아내는 보링기계가 필요하고, 100분의 1mm의 정확도를 내려면 내부를 연마해야 됩니다. 그리고 강선을 파려면 강선 파는 기계도 필요합니다. 몇 가지 예만 들었는데 화포를 만들자면, 이런 기계가 전부 구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계가 당시 국내에 있을 리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 수석은 "기계가 없으면 머리를 짜서 만드는 것이 기술자가 아니냐? 꼭 필요한 기계는 만들어서 써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도 이상해서 "기계를 들여다가 만들면 되는데 왜 그리 서두르십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오 수석은 "이런 식으로 만든 대포를 실제로 사용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소. 대포가 완성되어도 쏘아보지 않아도 좋소. 다만 대포를 만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훈련을 시키자는 뜻이오. 개발하는 사람이나 제작하는 기술자 모두 대포를 만드는데 대한 공포증이 있는가 본데, 이것을 타파하자는 게 목적인 것이오. 이런 식으로라도 대포를 만들어 보면, 애착이 생기고 자신이 생길 것 아니오.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추진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105mm 곡사포 시제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서울공대 기계과를 막 졸업하고 새로 입사했던 이원백(李元柏)씨의 회고도 들어보자.
『화포류의 도면이라곤 청사진으로 된 일부분을 비공식 경로로 입수한 것뿐이었는데 이를 보고 얼기설기 꿰어 맞추어 부품 목록과 도면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이수영(李水永) 실장(故人)이 105mm 곡사포 한문을 구해 갖고 와서 국방과학연구소 요원들은 그것을 분야별로 나누어서 역설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역설계를 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장비의 원 설계자의 설계 개념을 파악하는 일인데 화포를 처음 대하는지라 쉽지 않았습니다.
주퇴복좌기는 진주에 있는 대동(大同)중공업이 담당하였고, 포신은 서울 구로동에 있는 대한중기(大韓重機)에서 담당하였습니다. 저는 주퇴복좌기와 마운트를 담당했는데, 진주와 구로동과 전방 사격장을 오가는 출장으로 신혼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당시 진주까지의 교통편은 남해선 밤열차와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뿐이었는데, 부산까지 고속버스로 간 후 진주 행 시외버스로 갈아 탈 때도 있었습니다. 9시간 내지 10시간이 걸렸습니다.
포신을 가공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강선가공과 약실 테이퍼 가공입니다. 이를 위해 다시 이수영 실장이 일제시대 때 조병창에서 일했던 사람을 찾아내서 그 사람의 조언으로 강선 가공기계를 제작하였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1973년 3월 105mm 곡사포의 총 조립이 대한중기 구로동 공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며칠 밤을 새워 잘 맞지 않는 것은 줄로 갈고, 덧붙이고 해서 억지로 끼워 맞추었습니다. 그런 후 포차로 견인해서 전방사격장으로 떠났습니다. 당시 국산초유의 대포를 끌고 서울거리를 달릴 때의 그 뿌듯한 성취감이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잘 나갈까? 어떤 사람은 첫발에 팍 주저앉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한국기술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평하면서 우리 연구원들이 헛고생만 하고 있다며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105mm 곡사포의 시제가 완성되고 성공적으로 시사까지 끝냈다는 보고를 듣고는 심히 기뻐했다. 우리나라가 대구경포를 국산화했다는 것은 사실, 일대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박 대통령은 포병출신이니 그 감개가 더 컷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래서인지 필자에게 "105mm 포를 보고 싶으니 시사회 준비를 하도록"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돼서 동년(73년) 6월 25일에 대구경화포, 즉 106mm 무반동포, 4.2인치 박격포, 105mm 곡사포에 대한 시사회가 열리게 됐다. 장소는 다락대였다. 참석인원은 극히 제한되었다.
시제포는 모두 3문밖에 없으니 2문으로 사격하고 한문은 전시를 했다. 시사는 105mm 곡사포부터 먼저 시작했는데, 먼저 곡사(曲射)로 발사했다. 그리고 곡사포는 포차로 끌고 와서 직사(直射)를 하게 된다. 맨 나중에 105mm 곡사포의 직사 사격이 있었다. 근거리에서 포를 목표물인 바위에 정조준 해서 쏘는 사격이다. 명중률은 대단히 좋았다.
다음은 이원백씨의 회고이다.
『드디어 시범사격 날이 왔습니다. 많은 훈련을 한 포병들 덕분에 곡사, 직사 모두 명중을 하여 장내는 우뢰와 같은 박수와 웃음꽃이 가득하였습니다. 시범사격이 끝난 뒤 박 대통령은 후면에 전시된 화포들을 돌아보고 개발 종사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아! 우리는 결국 해냈습니다. 그 당시의 우리는 젊었고 국방과학연구소도 활기가 넘칠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불철주야 정신 없이 뛰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공학도의 애국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행사가 있게 되면 보통 행사 날짜가 먼저 잡히고 난 후 거꾸로 여기에 맞추어 준비작업에 대한 일정을 짜게 되는데, 처음에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빡빡한 일정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개발업체도 전력투구를 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나면 뒤처리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모든 것이 중량물이기 때문에 중노동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허리가 온전치 못하고 얼굴이 부어 오르는 증상이 생기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또 다시 불철주야 뛰어야 했습니다.』
1973년 6월 시사회가 끝나고 난 후 하비브(Harbib) 미 대사의 식사초청이 있었다. 이때 미 대사는 "국산 105mm 포에 문제가 많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식사 후 실무자의 의견을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쓰지도 못하는 포를 만들려고 생각지 말고 미국 제품을 사다 쓰라는 뜻이라고 느껴졌다. 식사 후 동석했던 부대사의 안내로 정원으로 나가보니 JUSMAG-K(한미합동 군사지원단)의 몽고메리(Montgomery)대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두툼한 자료 철을 내보이면서 한 조목씩 설명을 했는데, 국산 포의 각 부위의 치수가 미군 규격상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제 이런 조사를 했는지 필자도 놀랐다. 그래서 필자는 "설계도면도 없이 만들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도면만 있으면 미제 포와 똑같이 만들 자신이 있다. 어떤 방법을 쓰던 도면을 구해서(즉 미국이 제공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서 구해서라도) 화포는 국산화하겠다"라고 말하고 돌아왔다.
미국 정부는 「한국측에 기술을 넘겨주지 않는 한 병기개발은 불가능하다」라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기술자료도 없고 전문기계도 도입하지 않은 한국이 105㎜포 현물만 보고 시제개시 후 불과 11개월 만에, 비록 미국 규격에는 합격하지 못하는 화포일망정 시제품을 만들어내고 시사까지 성공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능력을 근본적으로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측의 화포 국산화 의지가 강경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1973년 6월 9일 유재흥(劉載興) 국방장관과 스틸웰 주한 美 군사령관이 각기 양국을 대표해서 「군병기/장비, 물자에 관한 기술자료 교환 부록」에 서명을 했고, 같은 해 9월 12∼13일에 있었던 한미연례안보회의에서 최종 결말이 났다. 이로써 105㎜ 곡사포를 포함한 각종 병기에 대한 기술자료(도면 포함)는 1974년부터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美 국방부 클레멘츠 차관은 "한국이 방위소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산업기반을 발전시키기 위해 미국의 산업기술과 한국의 산업을 결부, 활용하는 공동 노력의 필요성을 권고하고 이 분야의 적절한 원조를 제공토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발표하면서 미국의 태도를 밝혔다. 추가 설명을 하면「방위산업은 한국에서 단독으로 추진하지 말라. 미국의 방위산업체와 한국업체가 공동 생산하는 방식, 즉 한미 공동생산 방식에 의해 추진해야 미국은 적극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협약으로 인해 생산된 제품은 한국군에서만 사용할 수 있고 수출할 때에는 미국정부와 협의를 해야 했다. 미국측은 우리나라에서 국산병기가 양산된 후에도 「수출에 대해서는 철저한 감시를 하겠다는 것이고 거부권을 갖겠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수출하고자 할 때에는 미국정부의 승인을 받게끔 되었는데 미국이 합의를 잘 해주지 않아 현재까지도 애를 먹고 있다.
한편 미국의 기술고문단 「하딘 팀」이 한국측에 기술자료 등을 임의로 너무 많이 도와주었다고 해서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 정부는 74년 「하딘 팀」으로 하여금 JUSMAG-K(한미합동 군사지원단)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철수하도록 했다. 우리나라의 방위산업이 급진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대해 미국측에서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로부터 미국의 국방과학연구소(ADD) 파견 요원의 임무는 기술원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ADD를 감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미국측으로부터 105mm 곡사포에 대한 각종 기술자료를 얻게 된 후 일의 진척속도는 빨랐다. 포 제작에 필요한 각종 소재를 생산하는 대형공장을 창원기계공업기지에 긴급히 건설했다. 포를 제작하는 각종 최신기계 설비도 도입했다. 포를 정밀하게 대량생산하는 데 필요한 특수 계측기구와 특수 치구(治具, 기계제작을 할 때 정밀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기구)도 일절 제작했다.
이들 작업을 1976년 말까지 모두 완성하고 77년부터는 본격적인 대량생산에 들어갔다. 곧이어 155mm 곡사포도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군에서 요청만 있다면 어떠한 대구경포도 필요한 수량만큼 생산해 낼 수 있는 완전한 기반이 이때 완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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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유용원의 군사세계에 올라왔던 KH-178 105mm 견인포 개발사의 내용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원문이 상당히 길어서 약간 편집을 했지만 흐름을 이해하시는 데는 불편함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KH-178은 2.6톤의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게로 CH-47 치누크 헬기와 UH-60 헬기로 운송이 가능하며 105mm 포탄을 사용하기 때문에 155mm보다 파괴력은 떨어지지만 분당 발사속도는 훨씬 빠르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가격도 2억 원대로 저렴하고 대한민국 육군은 무려 340만 발이나 되는 105mm 포탄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 육군은 KH-178 견인포를 1개 대대 분량만 도입을 했을까요? 인도네시아와 칠레에 도입된 KH-178 견인포가 4개 대대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의아한 부분입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당시 추세가 105mm 보다는 155mm 야포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KH-178 105mm포가 실전 배치된 초기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국방TV 자료에는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요. 아무래도 제대로 된 계측 기구나 정밀 가공기도 없는 상태로 도면 없이 역설계를 하다 보니 탄피가 걸린다든지 제퇴기가 부서지는 사고 등이 연달아 발생했던 것입니다.. 물론 개발사에서도 나왔듯이 미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도면과 기술 지원을 받은 이후부터는 이런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 상태입니다.
현대 위아(WIA)의 정보에 따르면 KH-178 105mm 곡사포의 생산 라인이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합니다. 제가 국방TV 순삭밀톡에 출품한 작품으로 국방홍보원에서 대상을 수상했을 때 부상으로 받은 ‘한눈에 보는 국군무기체계 2020’ 도감에서도 KH-178 105mm포를 찾아볼 수가 있는데요. 업그레이드 버전인 KH-178 MK1에는 GPS 기능이 추가되고 제원 입력 등이 자동화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들이 있습니다.
육군에 극소수만 도입된 KH-178을 제외한 나머지 105mm 곡사포들은 현재 차량형 자주포 K-105A1으로 다시 태어날 예정입니다. 앞 부분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우리나라에는 무려 340만발이 넘는 105mm 포탄이 비축되어 있기 때문이죠. 차량형 자주포 K-105A1에 대해서도 찬반 의견이 대립되고 있는데요. 앞으로 이를 다뤄볼 때가 올 것 같습니다.
외신링크 https://www.janes.com/article/45482/upgraded-kh178-artillery-system-offers-more-range-indo14-day3
이 포스팅을 유튜브 영상으로 보고 싶다면? https://youtu.be/04r4Q4DcU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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