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미소 냉전이 종식된 이후 미국은 물론 유럽을 위시한 많은 나라들이 대규모 지상전을 상정한 지상무기 플랫폼 개발을 중지하거나 동결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존재 자체가 냉전 형식의 위협을 불러일으키는 북한과 중국 때문에 지상무기 플랫폼 개발을 멈출 수가 없었던 대한민국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전 세계 자주포 시장을 호령하는 K9 자주포와 전 세계 주력전차 선정사업에서 단골 후보로 선정되고 있는 K2 흑표, 호주 차세대 보병전투장갑차 수주전에서 최종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AS-21 레드백 같은 강력한 지상무기 플랫폼을 양산해 내는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기갑부대들이 우크라이나 병사들의 대전차 미사일에 박살이 나면서 “전차 무용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394화에서 논의해 본 적이 있는데요. 사실 “전차 무용론”으로 탱크가 위기에 빠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가자(Gaza) 지구 시가전에서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에 의해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전차 무용론이 고개 들었지만 이스라엘은 트로피(Trophy) 능동방어시스템을 개발하여 메르카바 Mk4 주력전차와 나메르 중장갑차에 장착했고 2011년 이후 지금까지 단 한대의 기갑차량도 대전차 미사일에 손실 당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트로피의 효과를 실감한 미 육군과 독일 역시 자국 전차들에 트로피 능동방어시스템을 앞다투어 장착하고 있을 정도죠.
러시아가 주력으로 운용하고 있는 T-90 시리즈의 경우 3.5세대급 반응장갑이 장착되어 있어 대전차 로켓에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크라이나군이 재블린(Javelin)이나 NLAW 같은 서방의 상부공격형(top attack) 대전차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데 있었죠.
러시아 전차들의 포탑 상부에도 반응장갑이 설치되어 있지만 재블린은 반응장갑을 파괴하는 선구탄두를 갖추고 있고 NLAW의 경우에는 운동에너지탄에 해당되는 폭발성형 관통자(EFP)를 갖추고 있어 웬만한 반응장갑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서방의 상부공격형 대전차 미사일에 자신들의 주력전차가 이런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러시아가 모르고 있었을까요? 외신 기사와 국내 군사 전문지를 읽어보면 러시아도 이런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인 2021년 11월 29일 미국의 Forbes가 게재한 기사를 보면 러시아 전차병들이 드론이 투하하는 소형 폭탄이나 상부공격형 대전차 미사일을 막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포탑에 쇠창살 우산(?)을 만들어 장착시켰다는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Forbes는 이런 쇠창살 우산이 소형 폭탄을 막아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재블린이나 NLAW 같은 상부공격형 대전차 미사일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을 해놨는데요. 그 말이 딱 맞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러시아가 이렇게 무식한 방법만 시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기술적으로 상부공격형 대전차 미사일을 막을 수 있는 차세대 능동방어시스템(APS)를 개발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아프가닛(Afganit)이라고 불리는 이 신형 APS는 원래 T-14 아르마타에 장착될 예정이었지만 T-90M 같은 신형 전차나 T-72 개량형에도 도입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합니다. 만약 아프가닛(Afganit)이 완성되어 러시아 기갑부대에 장착이 완료되었더라면 지금 우크라이나의 전황은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2014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강제적으로 병합시키면서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수준이기는 하지만 경제적, 기술적 제재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GDP가 1% 정도 하락할 정도였다는데 일부 군사 전문지들에 의하면 이 당시 경제적, 기술적 봉쇄조치 때문에 T-14 아르마타와 아프가닛의 개발 및 배치가 예상보다 한참 더 늦어졌다는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러시아 기갑부대가 당하고 있는 막대한 피해는 러시아 스스로가 자초한 셈이라는 분석이죠.
크림 반도 무단합병으로 인한 1% 경제 후퇴로 이 정도 결과를 불러왔었는데 앞으로 더 강력해질 서방의 봉쇄조치로 러시아 경제수준이 지금보다 최소 6% 이상 어쩌면 두 자리 숫자대로 후퇴할 것이라는 예상들이 나오고 있으니 그 후폭풍이 가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러시아가 몰락한다면 최대 수혜자는 아마 중국이 되겠죠. 러시아의 중국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고요.
어쨌든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부분은 상부공격(top attack)이 가능한 서방의 3세대 대전차 미사일에 대응할 수 있는 차세대 능동방어시스템(APS)를 개발하기 위해 우리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추종하고 있는 모델이 바로 러시아의 아프가닛(Afganit)이라는 사실입니다. 러시아의 아프가닛(Afganit)은 상부공격형 대전차 미사일을 막아낼 수 있는 최초의 APS라고 불리고 있는데요. 여하튼 러시아의 기술을 참으로 유용하게 잘 써먹고 있는 나라들 중 하나가 다름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아프가닛(Afganit) APS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탐지능력입니다. 수평 혹은 수직으로 날아오는 대전차 미사일을 조금이라도 빨리 탐지해 낼 수 있어야 요격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아프가닛(Afganit)에는 Su-57 PAK FA를 위해 개발되었던 X밴드 대역의 AESA 레이더가 탑재됩니다. 이 AESA 레이더는 포탑 4면에 장착되어 360도 감시가 가능하며 레이저 경고 수신기와 함께 자외선 센서가 추가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지상에서 사용되는 레이더의 경우 난반사가 심하고 전장에서 비행하고 있는 수많은 물체들 중 대전차 미사일 위주로 선별하여 감지하기 위해 자외선 센서가 추가된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상부 포탑을 향해 날아오는 대전차 무기체계를 직접적으로 요격할 수 있는 APS는 개발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아프가닛(Afganit) APS는 대전차 무기체계를 직접적으로 요격할 수 있는 대응탄과 함께 상부 포탑을 공격하는 미사일의 접근이 감지되면 전차를 모든 종류의 유도체계로부터 차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다영역 연막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ADD)가 아프가닛(Afganit)을 추종한다는 의미는 결국 강력한 탐지성능을 가진 AESA 레이더와 레이저 경보장치 그리고 대전차 미사일 특유의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는 자외선 센서를 개발하여 장착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며 수평적 대전차 미사일 공격에는 요격탄을, 수직적 공격에는 다영역 연막탄을 사용하여 대응할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K2 흑표를 위한 요격탄과 연막탄이 이미 개발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2011년에 K2 흑표용 능동방어시스템(APS)에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파편 요격탄이 있는데요. 말 그대로 사방으로 파편을 확산시켜 대전차 미사일을 요격하는 형태이다 보니 주변의 차량과 인명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발생했고 이런 저런 이유로 그 동안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노르웨이 수출형 K2NO에도 원래 APS가 아닌 이스라엘제 트로피 능동방어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4년까지 47억을 투자해 『전방집속 파편탄두 설계기술』연구를 진행하고 2023년부터 2026년까지 80억의 예산을 투입해 『초고속 초소형 위협체 무력화기술』 연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용어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국방과학연구소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방집속 파편탄두 설계기술』은 미사일, 로켓 또는 포발사 탄약의 위협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다수의 성형파편을 표적방향으로 집속하여 방출시킬 수 있는 기술을 뜻한다고 하는데요.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 트로피 APS를 2024년까지 한국형으로 개발하겠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2026년까지 개발하겠다고 언급되고 있는 『초고속 초소형 위협체 무력화기술』은 원거리, 근거리에서 접근하는 초고속/초소형 위협체인 운동에너지탄 및 대전차 무기체계를 초근거리에서 무력화시키기 위한 기반기술로써 폭발성형탄자 혹은 지향성 폭약을 대응수단으로 방호성능은 극대화하고 주변피해효과는 최소화시킬 수 있는 핵심기술을 뜻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를 쉽게 설명하면 역시 이스라엘이 만든 아이언 피스트 APS를 한국형으로 개발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아이언 피스트와 트로피 모두 이스라엘이 만든 APS로서 지금까지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여 미 육군과 독일 등이 채용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설명을 드렸는데요. 아이언 피스트가 트로피의 발전형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아이언 피스트는 약 1m 범위에서만 작동하며 트로피보다 훨씬 더 정밀한 요격 성능을 자랑합니다. 물론 그만큼 기술적 난이도는 높아지겠죠.
게다가 아이언 피스트는 강력한 폭압을 이용하는 고밀도 비활성 금속폭약(DIME)를 사용하고 있어 대전차 미사일뿐만 아니라 운동에너지탄인 날탄도 튕겨내거나 궤도를 변형시켜 회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두 방식 모두를 2026년까지 개발 완료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있는 것이죠.
이로써 대한민국 주력전차인 K2 흑표에 탑재하게 될 차세대 능동방어시스템(APS)의 탐지체계와 요격체계는 이해가 되셨을 겁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상부 공격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는데요.
제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향후 상부 포탑 방어용 요격탄이 개발될 예정이지만 현재 존재하는 요격탄으로는 상부 공격을 방어하기 어렵다고 나와 있습니다. 대신 우수한 탐지체계로 상부 공격을 빠르게 감지하여 다영역 연막탄으로 대응하는 기술을 사용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요. 결국 상부공격 방어용 요격탄이 나오기 전까지는 재블린은 “피하는 것이 상책” 이라는 이야기로 이해가 됩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IR/MMW 동시 차장 신물질 개발기술』이라는 이름으로 K2 흑표가 기존에 사용하던 K419 다영역 연막탄보다 발전된 소재로 만들어진 연막탄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가시광선과 적외선 심지어 밀리미터파 레이더까지 차단할 수 있어 주력전차뿐만 아니라 아군 부대 및 전투장비들도 보호할 수 있게 만들어질 것이라고 하네요.
러시아 아프가닛(Afganit) APS를 추종하고 이스라엘 트로피 및 아이언 피스트에서 사용하는 방식의 요격탄과 신물질로 만들어진 연막탄을 사용하는 한국형 차세대 능동방어시스템은 2026년 이후로 예정되어 있는 K2 흑표 성능개량사업을 통해 K2 흑표 개량형이나 K1A3 전차 등에 장착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 드립니다.
무기의 역사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습니다. 스텔스 기술이 등장하자 안티 스텔스 기술이 등장한 것처럼 전차의 반응장갑과 능동방어시스템이 등장하자 새롭게 탄생한 존재가 바로 상부공격형 대전차 무기인 것이죠. 머지 않은 미래에 러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가 주력전차를 제대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전차 무용론” 또한 한동안 수면 밑으로 가라앉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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